근육질이

"포기만은 하지 마" — 최가온

whatislo 2026. 9. 11. 22:52

2026년 2월, 리비뇨 스노파크의 마지막 스타팅 게이트

2026년 2월 12일 밤(한국시간 13일), 이탈리아 리비뇨 스노파크. 여자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결선 마지막 조, 최가온이 스타팅 게이트 위에 섰음. 두 번의 런에서 두 번 다 넘어진 직후였음. 관중석 조명이 하얀 파이프 벽을 비추고 있었고, 스코어보드엔 그 이름 옆에 11위가 찍혀 있었음. 12명 가운데 11위. 마지막 세 번째 시기 단 한 번으로 순위를 뒤집어야 하는, 사실상 벼랑 끝 상황이었음.

여기까지 온 과정부터가 이미 드라마였음. 스노보드 좋아하는 부모님 손 잡고 어릴 때부터 보드를 탔고, 2017년엔 아홉 살 나이로 가족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보드 타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있음. 동호회에서 무료 강습받다가 코치 눈에 띄어서 선수로 전향했고, 중학교 2학년 땐 아예 훈련 여건 맞춰서 전학까지 갔음. 그렇게 시작한 지 몇 년 만에 2022년 주니어 세계선수권 우승, 2023년엔 X게임 여자 슈퍼파이프 최연소 우승에 첫 월드컵 출전에서 한국 여자 선수 최초로 금메달까지 땀. 2025~26 시즌엔 월드컵 3연승에 시즌 랭킹 1위(크리스탈 글로브)까지 챙기고 올림픽에 왔음. 그러니까 이번 대회는 “신인의 이변”이 아니라 몇 년째 쌓아온 실력이 올림픽 무대에서 터지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던 거임.

그리고 우상이었던 클로이 김. 2018년부터 최가온을 직접 멘토링해준 선배였음. 롤모델이자 같은 조에서 경쟁하는 라이벌이 된 셈인데, 정작 결선에서는 그 클로이 김이 1차 시기 88.00점으로 1위를 달리고 있었음.

1차 시기부터 최가온 본인은 순탄하지 않았음. 고난도 기술 들어가다가 착지에서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크게 넘어졌고, 한동안 일어나지도 못했음. 파이프 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던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고 나중에 전해짐. 2차 시기는 더 안 좋았음. 다시 추락, 이번엔 충격이 더 컸고 의료진이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올 정도였음. 이 시점에서 기권 가능성까지 거론됐다고 함. 코치진도, 중계진도 다음 시기를 강행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분위기였음.

본인이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힌 게, 그 넘어진 순간 아버지가 평소에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고 함. “포기만은 하지 마.” 어릴 때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그 한마디가, 올림픽 무대에서 두 번이나 넘어진 순간에 다시 들렸다고. 몸은 만신창이였는데 게이트로 다시 올라가는 발걸음은 의외로 흔들리지 않았다고 함.

그리고 3차 시기, 마지막 런. 표정은 담담했음. 카메라가 클로즈업으로 잡은 얼굴에 긴장보다는 오히려 체념에 가까운 차분함이 보였다는 얘기가 많았음. 여기서 진짜 대단한 게, 통증이 남은 상태에서 아까보다 더 어려운 기술을 욱여넣은 게 아니라 오히려 난이도를 낮췄다는 거임. 1080도급 이상 고난도 회전 대신 900도와 720도 조합으로 완주 루트를 통째로 새로 짬. 하프파이프 채점은 난이도(디피컬티)만 보는 게 아니라 공중 높이(앰플리튜드), 완성도(이그제큐션), 기술 구성의 다양성(버라이어티)까지 종합해서 100점 만점으로 매기는 방식이라, 무리하게 난이도만 올리다 착지에서 무너지면 오히려 점수가 깎임. 확실하게 끝까지 서 있는 쪽을 택한 건 도박이 아니라 계산이었던 셈.

파이프 한쪽 벽을 타고 올라가서 첫 회전, 깔끔한 착지. 반대쪽 벽으로 넘어가서 두 번째 회전, 다시 착지. 속도가 줄지 않게 라인을 유지하면서 세 번째, 네 번째 구간까지 리듬이 한 번도 끊기지 않았음. 앞의 두 시기에서 무너졌던 바로 그 지점을, 이번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감. 마지막 벽에서 뛰어올라 착지하는 순간, 그 짧은 몇 초가 이 대회 전체를 뒤집는 장면이 됨.

이 장면이 한국 설상 스포츠 전체에 갖는 의미도 큼. 그동안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은 쇼트트랙이나 스피드스케이팅처럼 빙상 종목에 강한 나라였고, 눈 위에서 타는 설상 종목은 상대적으로 변방 취급을 받아왔음. 그 흐름을 열아홉도 안 된 선수가 하프파이프 결선, 그것도 두 번 넘어진 뒤 세 번째 시기에서 뒤집어버린 거임. 다음 올림픽 사이클에서 한국 스노보드 유망주들이 늘어날 가능성을 열어준 장면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듯.

1차 추락부터 금메달까지, 세 번의 시기

점수 발표. 90.25점. 1차 시기 88.00점으로 선두를 달리던 클로이 김을 역전하는 점수였음. 클로이 김 입장에서도 이후 시기에서 흔들리면서 결국 은메달로 밀림. 최가온, 이때 나이 17세 3개월. 최연소 금메달 기록이면서 동시에 한국 스키·스노보드 통틀어 설상 종목 사상 첫 금메달이었음. 멘토와 제자가 같은 결선에서 1, 2위를 나눠 가진, 흔치 않은 장면이기도 했음. 리비뇨 스노파크 관중석이 통째로 들썩였다는 후기가 많았고, 한국에서도 그 밤늦은 시간까지 생중계를 지켜보던 팬들 사이에서 실시간으로 난리가 났었음.

다시 그 스타팅 게이트로 돌아가 보면, 사실 그 몇 초 동안 바뀐 건 기술도 난이도도 아니었음. 두 번 넘어지고도 세 번째 게이트에 다시 설 수 있었느냐, 그거 하나였음. 기술도, 난이도도, 운도 아니었음. 결과만 놓고 보면 “드라마틱한 역전”이라는 한 줄로 요약되겠지만, 그 안에 있었던 건 통증을 누르고 다시 올라선 몇 걸음, 그게 전부였음.